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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House officially opened its doors in 1988. Just a few months after arriving in Montreal, the Park family got straight to work. The restaurant operated for 13 years until Mr. Park decided to call it quits. As you can imagine, a lot happened behind those heavy wooden doors. Tens of thousands of people passed through: at one time, it was the place for many local Korean immigrants who otherwise only had churches to interact with fellow Koreans. Every Korean consulate event in Montreal was held there. Diplomats and politicians who visited the city made their way through its doors, and even one of South Korea’s presidents graced the establishment with his presence. During film festivals, famous Korean actors held press conferences at Madame Bong’s restaurant. Whenever there was an opportunity to represent Korean cuisine, she was called upon to cater the event.
The reception Madame Bong received was extraordinary. She often wondered, "How are all these fancy people coming to eat my food?" She would stare at the empty bowls and plates left behind and feel a deep sense of gratitude.
One group Madame Bong especially loved hosting was tourists. Before the restaurant on Queen Mary closed, the family was overwhelmed by the number of tourists they served. Any Korean traveler who purchased a guided tour of Montreal—whether from North America or South Korea—inevitably stopped at Korea House to enjoy Madame Bong’s set menu. For nearly five years, almost every week, Greyhound buses would drop off 50 to 150 people outside the restaurant. Once seated, guests were served a steaming plate of marinated meat alongside a pot of stew (either kimchi or dwenjang). It was a family effort—all hands on deck. At first, it was exhilarating, but Madame Bong’s children grew to resent the tourists. It often felt like the guests waited until they reached a Korean restaurant to voice every complaint about their trip. They wouldn’t dare be so vocal at a Canadian restaurant, especially to white staff. The expectations left no room for delays or mistakes, which made the work extremely challenging.
Despite this, Madame Bong adored these groups. She cherished the relationships she built with the tour guides, often saving special banchan (side dishes) just for them. She understood how hard it was for the guides to manage the tourists all day, every day, while she only had to deal with them for an hour. To many of the guides, Madame Bong became a mother figure—a warm, caring presence who made sure they were well-fed and looked after during their brief visits.
Although Mr. Park was the trained chef, he preferred spending his days in the dining hall with customers. He was charismatic and funny, thriving on moving from table to table, engaging in small talk with patrons. Meanwhile, Madame Bong, more reserved by nature, found the kitchen to be a welcome retreat. She enjoyed its calm environment and focused wholeheartedly on preparing food that people loved. Whenever Mr. Park entered the kitchen, however, Madame Bong would tense up. As the head of the family and the "expert," his commanding presence was intimidating. He exerted significant control over the family dynamic, often framing his own narrative around the lack of love he had received growing up.
Though the business was successful, Madame Bong often reflects on those years with grief. "It was a struggle," she recalls. "My husband was so volatile, and we never knew what he would do."
One particularly harrowing memory stands out. "We were preparing for an event—one of Korea’s most beloved actors was visiting, and we had to host 80 to 100 people. The night before, my husband took $40,000 in cash and the restaurant keys and disappeared. We had to call a locksmith to open the door, and I prepared all the food for the event myself. I’m so thankful for my children, especially my eldest, who came to support me. I don’t know what I would’ve done without them.”
한국회관은 1988년에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몬트리올에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박 씨 가족은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레스토랑은 13년 동안 운영되었고, 이후 박 씨가 은퇴를 결심하며 문을 닫았습니다. 그 무거운 나무문 뒤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한인 이민자들이 교회 외에 한국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모든 한국 영사관 행사는 이곳에서 개최되었고, 도시를 방문한 외교관들과 정치인들도 이곳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대통령 한 분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제 기간 동안 유명한 한국 배우들이 봉 여사의 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습니다. 한국 음식을 대표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봉 여사가 음식을 준비하러 불려갔습니다.
봉 여사는 이러한 반응이 놀랍고도 감사했다고 회상합니다. 그녀는 자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내 음식을 먹으러 오는 걸까?" 그리고 빈 그릇과 접시를 보며 깊은 감사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봉 여사가 특히 좋아했던 손님 중 하나는 관광객들이었습니다. 퀸 메리 거리의 레스토랑을 닫기 전, 가족은 관광객들로 인해 매우 바빴습니다. 북미나 한국에서 몬트리올로 오는 관광객들은 반드시 봉 여사의 코스 요리를 먹으러 왔습니다. 약 5년 동안 거의 매주 그레이하운드 버스가 50명에서 150명의 손님을 레스토랑 앞에 내려놓곤 했습니다.
손님들은 자리에 앉으면 양념된 고기와 김치찌개 또는 된장찌개 중 하나를 제공받았습니다. 이는 온 가족이 모두 참여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모든 손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흥미진진했지만, 봉 여사의 자녀들은 점차 이 관광객들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관광객들은 마치 여행 중 쌓인 불만을 한국 식당에서만 풀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캐나다 식당에서 백인 직원에게는 절대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을 것 같았죠. 모든 일이 정확하고 신속해야 했기에 스트레스가 상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 여사는 이런 그룹을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투어 가이드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고, 종종 가이드들을 위해 특별한 반찬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녀는 가이드들이 이 많은 관광객을 하루 종일, 그리고 며칠씩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손님들을 단 한 시간만 상대하면 됐지만, 가이드들은 하루 종일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봉 여사는 많은 가이드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날 수 있는 따뜻한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가이드를 잘 챙겨주는 그녀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한편, 박 씨는 요리사로 훈련받았지만, 주방보다는 식당 홀에서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는 유머러스하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었으며,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겼습니다. 반면에 봉 여사는 다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런 사회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휴식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조용한 주방 환경에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박 씨가 주방에 들어올 때마다 그녀는 긴장했습니다. 그는 가족의 가장이자 전문가로서 위압적인 존재였으며, 가족을 강하게 통제했습니다. 가족 내 이야기는 항상 "박 씨가 성장 과정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라는 주제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지만, 봉 여사가 그 시절을 회상할 때면 슬픔이 밀려옵니다. "정말 힘든 시절이었어요. 남편은 너무 감정 기복이 심해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항상 두려웠죠."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배우 중 한 분이 방문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80~100명을 접대해야 했죠. 그런데 행사 전날 밤에 남편이 4만 달러의 현금과 레스토랑 열쇠를 들고 사라졌어요. 열쇠공을 불러 문을 열어야 했고, 저는 혼자서 그 많은 음식을 준비했어요. 제 아이들, 특히 제 큰아들이 저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어쩔 뻔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들에게 너무 고마워요."